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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최후”

*해당 만화는 제한된 소재로 제작되어 내용이나 의상&배경 등이 고증과 다를 수 있습니다.
1888년 2월, 2년 동안 2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리고 몸이 약해진 고흐는 요양을 위해 파리를 떠나 아를로 향했습니다. 고흐가 파리에서 미술의 이론적인 부분을 발전시켰다면 아를에서 고흐는 점묘법을 적용하여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양식으로 그림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하여금 우리가 오늘날 고흐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강렬한 표현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아를에서 고흐는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고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화가들에게 모두 편지를 보냈고 그 중에 고갱이 고흐의 제안에 응했습니다. 두 사람은 아를에서 함께 살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잘 맞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고흐와 고갱의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얼마 안 가 두 사람은 계속 충돌했고 갈등은 점점 쌓여만 갔습니다. 그러다 두 사람의 갈등이 절정을 찍었을 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바로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때문이었습니다, 또렷한 눈동자를 가진 고갱의 다른 그림들과는 다르게 그림 속 고흐는 흐리멍텅한 눈을 하고있었습니다. 고흐는 고갱이 자신이 미쳤다고 여겨 이를 조롱하기 위해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고흐가 술집에서 고갱에게 술잔을 집어던지며 화를 내는것으로 둘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습니다. 그리고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잘라버린 귀를 가끔 만나던 매춘부에게 줘버렸습니다. 크게 놀란 매춘부는 고흐를 신고하고 고흐는 경찰에 의해 1889년 5월 8일,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고흐는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과 사이프러스 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들 등, 고흐의 후기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작품들이 이 시기에 그려졌습니다. 게다가 몇며 전시회에서는 고흐의 그림이 호평받으며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유명세에 신경쓰기보다는 화가로서 훌륭한 작품을 남기는 데 더 집중했습니다. 당시의 고흐는 건강악화로 인해 우울증이 온 건지 이때까지의 그의 그림에 스스로 혹평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림이 생각대로 안 그려지는 것에 대한 비관도 심했습니다.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고있는 상황과 주기적인 발작에 대한 불안감도 고흐를 압박해왔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생레미에서 오베르로 정신병원을 옮기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흐는 마치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처럼 자신의 심정과 내면의 변화를 담아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1890년 7월 27일, 고흐는 결국 쇠약해진 몸과 정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총상에 의한 감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흐의 그림은 고흐의 죽음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20세기 후반에는 고흐의 두드러진 색채, 힘찬 붓터치, 그리고 왜곡된 형태가 높은 평가를 받아 오늘날에는 후기 인상파 중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출처 - 투닝 GPT,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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