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만화는 제한된 소재로 제작되어 내용이나 의상&배경 등이 고증과 다를 수 있습니다.
1910년 나라 망하기 직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총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도산을 도발로 보던 일본 헌병대가 도산과 그 친우들을 구금하였으나 도산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구금했습니다. 도산은 구금에서 풀려나자마자 독립전쟁 전략을 세웠고. 이 전략은 1945년까지 한국 독립운동의 최고 전략으로 사용되며, 국내에서는 신교육 등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민족 간부를 양성하고 사립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도산은 1910년 8월에 우리나라가 완전히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잠시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그 후, 미주에서 신민회 전국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독립전쟁 전략을 세워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밀산으로 돌아온 도산은 불행히도 돈 문제와 간부 간의 갈등으로 밀산 무관학교 설립 계획이 좌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신민회를 통해 민족 간부를 육성하고 흥사단을 조직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도산은 상해로 향하고 임시정부의 수석총장을 맡게 됩니다. 도산은 흥사단의 돈으로 사무실을 빌리고 센터를 설치하여 임시정부 조직에 기여했습니다. 1919년 6월 28일,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되어 조직을 추진했습니다. 이승만 등과 함께 국민대표대회를 개최하여 9월 10일에 통합 임시정부를 선포했습니다.
총장은 도산 안창호, 차장은 신한청년당 당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3·1운동에 기반을 둔 국민대표 대회를 통해 통합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으며, 도산은 노동 국장으로 임명되어 노동부를 주도했습니다.
출처: 투닝gpt, [제1회 도산안창호포럼]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 형성과 민족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