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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호, 이상주의자의 삶 “

*해당 만화는 제한된 소재로 제작되어 내용이나 의상&배경 등이 고증과 다를 수 있습니다.
1926년 5월 말 다시 상해로 간 도산은 이제 좌우 합작의 대독립당운동(大獨立黨運動)에 앞장섰다. 좌우합작론은 1924년경부터 국내외에 걸쳐 제기되었는데,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산발적으로 논의되는 데 그치고 있던 좌우합작문제를 중국과 만주에서 본격적인 실천운동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도산이었다. 상해 도착 후 한 달 여가 지난 7월 8일 140명의 동포가 모인 가운데 도산이행한 ‘임시정부 문제와 우리의 혁명운동에 대하여’라는 연설은 그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도산의 주도로 시작된 좌우합작 운동은 한동안 활발히 추진되다가 실패로 끝나, 1920년대 말 중국에서의 한국독립 운동계는 결국 민족주의자들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사회주의자들의 한국 독립운동자동맹(韓國獨立運動者同盟)으로 나뉘어지고 말았다. 한국독립당은 상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우리 나라 민족주의 정당이었는데, 도산계(서북파, 흥사단계)와 이동령계(기호파, 임정계)를 주축으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28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도산은 강령 기초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대공주의(大公主義)에 입각한 한국독립당의 강령을 주도했다. 후일 그가 국내로 압송된 후 한국독립당에 모였던 인물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되었지만, 임정을 비롯한 모든 민족주의 단체들은 도산의 뜻이 반영된 강령만은 대부분 그대로 계승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도산은 오래 기다리던 기회가 오고 있다고 판단하여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대일전선 통일동맹을 추진하던 그는 윤봉길 의거의 여파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었다. 도산은 4년 반에 걸친 두 차례의 감옥생활 끝에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서울대) 부속병원에서 만 59년 4개월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투닝gpt, 흥사단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업적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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