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만화는 제한된 소재로 제작되어 내용이나 의상&배경 등이 고증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유관순은 천안 헌병대를 거쳐서 공주 재판소로 넘어갔다. 공주에 수감되어 있을 때에는 공주 영명학교에서 만세를 주동하여 체포된 오빠 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일경은 유관순에게 갖은 고문을 하였다. 처음에는 어린애로 생각하고 배후를 추궁해 보았으나,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은 주모자가 자기라는 것 외에는 더 말하지 않아 아무 비밀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는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유관순은 1심 재판에서 비록 나이 어린 학생이었으나, 아우내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보아 5년형을 받았다.
그 해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판결에 이어, 중형을 받은 사람은 모두 다시 경성 복심법원으로 넘겨졌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스승인 박인덕 여사를 만났으며, 이신애를 만나기도 하였다. 그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초심법원인 공주 지방법원의 판결에 대해 일부 무혐의 처리를 하고, 형을 감량하여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유관순은 안중근 의사가 여순에서 상고를 포기하고 1심만으로 사형을 맞은 것과 같이 日人의 재판을 거부하여 고등법원에 상소함을 포기하였다.
유관순은 일본인들이 판치는 이러한 세상에서는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옥중에서도 조석으로 만세를 외치며, 동지들을 격려하고, 고무하였다. 유관순은 그때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더욱이 1920년 3월 1일이 되자, 3.1만세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옥중에서도 만세를 주동하여 일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1920년 3월 28일 영친왕의 일본인과의 결혼을 기념하여 모든 수형자의 형기를 반으로 줄이어 출옥시켰으나, 유관순은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인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이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一,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는 뜻을 끝까지 지키다 결국은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마침내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형무소에서 그렇게도 목메어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꽃다운 나이 19세에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이화학당 장인 웰터와 김현경 선생과 오빠 유우석 등이 시신을 수습하여 이화학당으로 모시었다. 그리고 출옥일로부터 삼일 째 되는 1920년 10월 14일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한 장례를 지냈다. 그러나 이후 아쉽게도 유관순의 무덤은 훼손되어 찾지 못하였다.
그 후 1962년 3월 1일, 국가에서는 유관순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수여하고, 열사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69년 추모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 10월 14일 이를 사적 제 230호로 지정하였다.
출처 - <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 “유관순 열사 일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