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만화는 제한된 소재로 제작되어 내용이나 의상&배경 등이 고증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유관순은 선교사 부인인 Mrs. Alise H. Sharp의 배려로 사촌언니인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에 편입학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학교생활에서도 매우 모범적이었다. 동료와 선생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음은 물론, 무슨 일이든지 솔선수범하였으며, 남을 위해 돕는 일에는 언제나 가장 먼저 앞장섰다.
또한 유관순은 매우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번은 친구와 한밤중에 태극기를 70여장이나 그려서 서양선교사의 방과 기숙사 학생들의 방, 그리고 교실마다 붙였다. 이로 인해 다음 날 소동이 일어났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정확한 태극기 그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가는 곳마다 만행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였다. 심지어는 가장 신성해야 할 교회에서조차 칼을 차고 들어와서, 보는 이로 하여금 비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스러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일깨우기 위해, 이화학당에서는 매주 금요일 저녁 이문회(以文會)를 통해 사회 저명인사를 초빙하여 시국에 대한 강연을 듣기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하던 유관순은 5인의 결사대에 참여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서거는 전 민족을 울분의 도가니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국민의 울분은 삼일운동을 촉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수많은 학생들은 연합하여, 3월 1일과 3월 5일에 일어난 서울 지역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화학당의 이문회에서도 2월 28일 열린 정기모임에서 3월 1일에 전교생이 소복을 입고 대한문(大漢門) 앞에 나가 망곡(望哭)을 하고, 만세 대열에 참여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학교 측은 이문회의 이러한 결정을 미리 알아차리고, 수위로 하여금 문을 잠그게 하였으며, 선생들이 교정 곳곳에서 지켰으나, 15명 정도가 수위를 밀치고 나가 군중과 합세하였다.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유관순도 이 비밀결사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유관순을 비롯하여 학우 6인의 결사대는 기숙사 뒷담을 넘어 파고다 공원으로 가서 만세를 불렀다. 3월 5일 서울역에서의 만세시위에서 유관순도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일제가 학생들의 맹렬한 시위에 놀라,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리자, 유관순은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으로 내려오는 기차에서, 덜컹거리는 기차소리를 친구들이 ‘동전 한 푼 동전 두 푼’하는 것 같다고 하자, 유관순은 ‘조선독립! 조선독립!’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 “유관순 열사 일대기”>